

칼리토 (Carlito’s Way)
칼리토는 원(◯)에 대한 영화다. 기하학적으로 시작점과 끝점이 동일한 원. 닫힌 도형이다. 칼리토의 삶은 원 모양의 리볼버 실린더와 같다. 탄창이 회전하며 다음 총알을 장전하듯, 그는 돌고 돌아 처음에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총에 맞아 들것에 실려 가는 오프닝의 플래시백은 닫힌 궤적을 응시하게 만든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시간이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행복은 반복이지만 인간에게는 반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그래도 칼리토는 직선을 원했다. 바하마라는 낙원을 향한 직선 - 합법적인 클럽 운영 - 조용한 삶.
하지만 세상의 중력은 그를 기어이 곡선으로 끌어당긴다. 결국 그는 바하마로 가는 직선을 그리지 못한 채 과거의 원형(原形)으로 굽어지고 만다. 다른 모양의 닫힌 도형과 다르게, 원은 궤도를 이탈할 수 있는 꼭짓점이 없다. 원형(圓形)과 원형(原形)이 같은 글자인 건 우연일까.
리볼버의 실린더는 그렇게 회전을 멈추고, 칼리토가 쓰러진다. 칼리토는 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칼이 아닌 총알에 쓰러지는 그가 마음에 든다.
“개과천선한 게 아니다. 그저 시간이 다 됐을 뿐이다.”

책 종이 가위 (Book, Paper, Scissors)
구겨진 종이와 구겨져 보이는 종이는 명백히 다르다. 기쿠치 노부요시는 평생 15,000권의 책 표지를 만들며 단 한 번도 포토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자르고, 풀을 바르고, 손아귀의 힘으로 종이를 구겼다. 그 사이 물질의 저항과 물리적인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졌다. 일종의 ‘아우라(Aura)’다.
디지털 세계는 이 시간을 단숨에 압축한다. 클릭 한 번에 구겨진 ‘효과’가 출력된다. 그로 인한 경제성에 쌍수를 들지만 기시감이 든다. 관념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개념을 실존적 세계로 억지로 가져오려는 움직임. ‘포앳코어’, ‘퍼포머티브’, ‘어쩌구 저쩌구’.
그러한 버튼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보이기 위한 안경과 기쿠치의 보기 위한 안경 사이에는 기능적 차이 그 이상이 존재한다. 영화 중반, 기쿠치 선생이 종이를 끌어안는 모습은 ‘현실에 찐득하게 붙으려는 그러한 효과들은 무용지물이다’고 말하는 듯 하다.
가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재. 기쿠치 노부요시의 수작업은 완고한 아집이 아니었다. 시뮬라크르가 범람하는 시대를 향한 육체적인 저항이었다. 15,000권이라는 무게는 이를 단단히 증명한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는 선생의 상처 난 손가락을 본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그 지난한 물리적 노동의 이유를 마주한다.
“디자인은 머리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손으로 정성껏 차려내는 행위다.”

바톤 핑크 (Barton Fink)
바톤 핑크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며 고집 피운다. 그리고 호텔 옆방에 사는 보통 사람인 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자 바톤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바톤이 쓰고자 하는 건 보통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 대한 자신의 오만한 상상이다.
대본을 완성한 바톤은 댄스홀에서 광란의 춤을 춘다. 홀가분해진 뒤 호텔로 돌아오자, 형사들이 바톤을 기다리고 있다. 찰리가 연쇄살인마란다. 그때 호텔이 불길에 휩싸이고 찰리가 나타나 형사들을 죽이고, “하일 히틀러”라 외치며 떠난다. 학살자 찰리는 유대인인 바톤을 살려뒀다. 하지만 바톤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았다.
영화 후반, 호텔을 벗어난 바톤은 찰리에게 받은 상자와 나란히 해변에 앉는다. 그 장면은 호텔 방에 걸린 액자 속 그림과 같다. 그는 호텔이라는 물리적 감옥에서 나왔지만 자신의 편견이라는 더 큰 액자 안으로 들어갔다. 재현하려던 자가 재현당한다.
그는 정말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썼을까. 영화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끝내 보여주지 않고, 액자 안에 갇힌 작가 하나만 건조하게 비춘다.
“나는 작가다, 이 괴물들아! 나는 창조한다고! 나는 창조해서 먹고산다! 나는 창조자다! 내가 바로 창조자라고!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 제복이다! 이것이 내가 보통 사람들을 섬기는 방식이다!”

디 아워스 (The Hours)
디 아워스는 세 여성의 하루를 보여준다. 1923년 런던의 버지니아 울프는 죽은 새를 땅에 묻고, 1951년 로스앤젤레스의 로라 브라운은 케이크를 만들고, 2001년 뉴욕의 클라리사 본은 파티를 준비한다.
사람의 1분에는 지나간 영겁의 시간이 겹쳐 있다. 로라가 케이크 앞에 선다. 그 순간 남편과의 첫 만남이, 아들의 탄생이 섬광처럼 번쩍인다. 그리고 말하지 못한 욕망이 번쩍인다. 클라리사가 꽃을 고른다. 젊은 날의 리처드와 그가 선택하지 못한 삶이 번쩍인다. 그리고 현재의 공허함이 번쩍인다.
버지니아는 강으로 걸어 들어가고, 로라는 가족을 떠나고, 리처드는 창밖으로 떨어졌다. 내면에 겹겹이 쌓인 시간을 외면한 채, 더 나아 보이는 공간으로 도망쳐도 실존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사랑한다는 건, 그 안에 겹쳐진 순간들을 끌어안는 행위다. 이 말은 거울 앞에 선 이에게도 동일하다.
“삶을 회피해서는 평화를 찾을 수 없어요, 레너드.”
그 외 영화들
〈존 말코비치 되기〉 : 존 말코비치는 이름이 존이냐 말코비치냐. 헷갈릴 바엔 그냥 나로 살란다.
〈화양연화〉 : 참 아름다운 영화였음. 근데 살짝 졸았음.
〈플로리다 프로젝트〉 : ‘잡히지 않는 무지개 끝에 황금이 있다’ 누구를 위한 이야기인가.
〈매트릭스〉 : 내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나에게도 그렇다.
〈파벨만스〉 : 어릴 때 이 영화를 봤다면, 나는 분명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며 울고 불고 떼를 썼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