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쏸라탕과 백현진 77쑈
입안이 헐었다. 스트레스가 입안에 꽃피운 건 아니고, 연남동 어느 중식당에서 뜨거운 쏸라탕을 먹었다. 먹을 때는 뜨거운 줄 몰랐다. 그릇을 비우고 식당에서 나오자, 혀와 오른쪽 어금니 잇몸이 따끔했다. 입안에 머물던 쏸라탕보다 지금 내 마음이 용광로여서 몰랐나 보다. 그렇다고 마음이 온갖 재료를 다 녹여낼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솥단지도 아니다. 누군가는 후후 불어 먹을 그 뜨거움이 입안에서 나뒹굴어도 곧바로 뱉어낼 줄 모른 건 사람 때문이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오른쪽 창턱에 놓인 원산지 표기판을 보았다. 화이트보드 위에 검은 글씨로 정갈하게 재료 이름과 원산지가 나열되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는 보드용 지우개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원산지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디로 할까. 매일 회사에서 들여다보는 러시아로? 아니면 미국으로? 독일, 영국? 그렇다 한들 결국 그곳에도 사람이 있을 테고 내 마음은 다시 열기로 가득 찰 것이다. 다행인 것은 돌아갈 곳은 확실히 정해뒀다는 점이다.
쏸라탕이 담긴 그릇이 반쯤 비워졌을 때, 취한 것처럼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죽고 싶진 않은데 뭐 죽어도 딱히 문제는 없겠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을 믿는다. 그래도 가끔 뱉은 말이 꽃이 되지 못하고 민들레 씨앗처럼 어디론가 그 문장을 싣고 사라져버릴 때도 있다. 꽃 피우길 바라지 않으며 뱉은 말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게 불분명해졌다. ‘(잘) 살고 싶지 않은데 뭐 (이대로) 살아도 딱히 문제는 없다.’ 단어를 바꾸자 살짝 나아졌다.
빈 그릇을 계산하고, 옆 건물 지하로 들어갔다. 계단 끝에 옆으로 서 있는 문이 공연장 입구가 아니란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도 처음 와본 장소이니, 일단 문고리를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어두운 안쪽에는 검은색 철제 선반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그때 백현진 배우/가수가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 쏸라탕을 안 먹었다면, 옷에서 음식 냄새가 벌써 빠져버렸다면 인사를 해봤을 텐데 그를 못 본 척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밝은 조명을 가진, 옷가게인지 카페인지 모를 곳을 끼고 돌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 앞 벽에는 원산지 표기판과 다르게 지워지지 않을 스티커들이 마구 붙어 있었다. ‘채널 1969’라는 글자도 그 사이에 있었다. 식당에서 본 글자보다 정갈하지 않았어도 조화롭고 분명했다. 사람에게 원산지라는 단어를 적용하려면 스티커처럼 덧붙여야 하는 건가. 싫다고 떼어내도 조금은 자국이 남기도 하고, 겹겹이 쌓이면 도드라지기도 하고.
백현진의 77쇼가 시작됐다. 맥주를 먹을 생각은 없었다. 술을 한 입이라도 마시면 안 하던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내 취향이 아니다. 마종기 시인이 생음악의 미덕이라 했던 그 생생함이, 알코올에 섞여 기화할 잡생각에 밀려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맨정신으로 그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으려 공연장 뒤쪽에서, 무대보다 입구가 가까운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선반처럼 빽빽하고 들쑥날쑥한 검은 머리들 때문인지 한동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검은 파도 위로 불쑥 조명을 받으며 머리가 하나 튀어 올랐다. 백현진이었다. 물속에서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것처럼 그는 노래를 시작했다. 특히 그가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은 내가 알던 가사였지만 내가 알던 노래는 아니었다. 이해하지 못하겠는 박자로 노래를 불렀다. 혀, 잇몸, 성대가 날것으로 부딪히는 목소리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리였다. 멀리서 노래를 듣다 ‘왜 나는 항상 교과서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비처럼 왔다. 이대로가 아니라 멋대로 살아도 딱히 문제는 없겠다.
나는 그를 화면에서 처음 봤을 때 우리 외삼촌과 닮아 친근하게 느꼈다. 외삼촌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무서워해서 거리감을 유지하던 걸 여기서라도 좁히려는 이 말도 안 되는 마음은 무엇일까. 남들 앞에 선다는 것은 이렇게나 쉽지 않을 일이다. 조명받은 사람을 각자가 온갖 생각으로 주무를 테니. 공연장에 들어오기 전에 본 마네킹에 입혀진 의상이 마음이 더 편하긴 하겠다. 그래도 무기체보다는 유기체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게 낫겠지.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사라지고, 검은 파도가 무대 쪽이 아닌 입구 쪽, 내 쪽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할 기세에 나는 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까 봤던 눈부신 가게 앞을 지나자, 백현진 배우/가수가 눈 앞으로 지나갔다. 그는 작은 키오스크와 나무 사이에서 멈춰서서, 문을 닫은 키오스크에 기대 얼굴을 파묻고 큰 숨을 들이쉬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그의 숨인가. 옷에서 쏸라탕 냄새가 빠졌음에도 인사를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작은 존경심이나 팬심에도 거리감이 필요하니.
버스를 타러 가면서, 아까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던 채팅방에 들어갔다. 두 명 중 아무도 아직 내가 보낸 문자를 읽지 않았다. 숫자는 그대로 2를 유지했다. 그리고 “죽고 싶진 않은데 뭐 죽어도” 어쩌고 하는 문자를 지웠다. 대신 77쇼에서 찍은 사진 하나를 보내며 새 문자를 보냈다.
“아, 다음에 또 와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