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씨네토크
정성일 평론가는 농담으로 시작했다. “드니 빌뇌브가 왜 사막으로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지, 제임스 본드를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가 메시아를 찾든, 007 작전을 수행하든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을 다시 보고, 그의 재능은 “과거 완료형”으로 탁월했다며 인정했다.
영화는 갓 태어난 아기의 발에 점 세 개를 찍는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어로 ‘부은 발’을 뜻한다. 그리스 신화가 중동으로 옮겨왔다는 걸 아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럼 오이디푸스 스토리를 중동 지역에서 풀어낸 게 대단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중동을 배경으로 한 오이디푸스 영화가 이미 존재한다고 했다. 「그을린 사랑」의 원작도 레바논 작가의 희곡이다. 스토리로만 보면 기독교인이었던 나왈이 어떻게 테러리스트가 되는가를 그리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플롯이었다. “야심 차다”고 표현했다.
영화는 10개의 에피소드(A-B-A-B…순)가 교차한다. 각 장은 빨간 글씨 제목으로 구분된다. A는 현재: 나왈의 딸 잔느가 유언을 따라 형과 아버지를 찾는 과정. B는 과거: 나왈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A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B는 답에서 증명으로. 정성일 평론가는 플롯을 “계산한다”고 했다. 잔느는 수학과 조교수다. 영화 초반, 교수가 그녀에게 묻는다. “콜라츠 추측을 설명해봐.” 어떤 자연수든 특정 규칙을 반복하면 결국 1로 돌아간다는 수열. 아직 증명되지 않은 난제다. 잔느가 나왈의 고향 다레쉬에 갔을 때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도 나온다. 일곱 개의 다리를 한 번에 건너는 방법. 한붓그리기. 1로 돌아간다. 한 번에 건넌다. 영화는 1에 집착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왈의 쌍둥이 아들 시몽이 모든 진실을 듣고 중얼거린다. “1+1=1.” 아들과 남편이 한 사람이라는 불가능한 등식.
나왈과 니하드는 헤어진 후 서로를 찾아 나선다. 둘의 방식은 다르다. 나왈은 삼촌 집 - 니하드를 낳았던 동네 - 고아원으로 간다. 과거를 따라 내려간다(우하향). 니하드는 악명 높은 저격수가 된다.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퍼뜨려,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우상향). 결국 두 그래프가 만나는 접점이 생긴다. 나왈은 테러리스트로, 니하드는 교화된 후 고문관으로. 그리도 간절히 찾았는데 감옥에서 만난다.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라이오스 왕은 신탁을 듣고 아기를 죽이려 한다. 신탁을 피하려다 신탁을 완성시킨다. 아기를 버렸기 때문에 아기가 돌아와 왕을 죽인다. 「그을린 사랑」에서 신탁은 무엇인가. 불타는 버스다. 나왈이 테러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하는 순간. 영화의 원제 Incendies는 프랑스어로 ‘불타는 것들’이다. 버스가 불탄 후, 정성일 평론가가 특정한 장면이 하나 있다. 나왈이 니하드를 찾기 위해 다리를 건널 때, 카메라는 그녀의 한쪽 얼굴만 비춘다. 반대편 얼굴, 즉 자신의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영화 첫 장면. 한 소년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관객을 본다. 이 아이는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어날 일을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성일 평론가는 예언자가 관객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안다. 니하드의 발에 찍힌 점을 봤으니까. 오이디푸스를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스크린 너머에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수학적 증명은 결국 완성된다. 1+1=1. 말도 안 되는 등식이 참이 되는 지옥.
메모장도 없이 본 영화였다. 기억에 의존해 썼다. 정성일 평론가가 정확히 어떤 문장을 말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이 수학적 플롯으로 비극을 증명했다는 건 분명하다. 드니 빌뇌브가 메시아를 찾으러 가기 전, 그의 재능이 예리했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