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른쪽에 보이는 것처럼 작은 글씨로 썼다. 구순인 할머니에게 줄 편지였다. 다 쓰고 나니, 돋보기 너머 글씨를 보려 찡그릴 할머니의 눈이 떠올랐다.
어릴 적 할머니와의 추억을 주저리주저리 쓰지 말고 그때의 내가 되자. 어린 글씨체를 보고, 짧은 순간 할머니도 그때의 손판금이 되어 기운 나길 바라며.
세밀하게 기억하는 게 좋을 때가 있고,
덩어리 채로 기억하는 게 좋을 때가 있다.
p.s. 손판금이라는 이름을 외우기가 어려워… 손으로 판 금. 아차차, 할머니는 여전히 강인하다.
p.p.s.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온 가족이 30년 전 이야기를 나눴다. 순간 예순 잔치인 줄.
첫 번째 편지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할머니에 대한 최초의 기억. 학교에서 돌아와, 안방에 혼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어요. 메릴 스트립이 나오는 “죽어야 사는 여자” 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인 제가 15세 이상만 시청할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있었지요. 이게 왜 15세 미만 시청 금지인지 궁금했어요. 이유는 잔인하게 단순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장면들이 쉬지 않고 나왔어요. 점차 잔인함에 익숙해질 때쯤,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저를 끌고 나갔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거 보는 거 아니라면서요. 어쩌면 그때부터 저는 세상에 대한 겁이 없어진 듯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잔인해도, 피할 곳이 있고 나를 꺼내줄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할머니 덕분에,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 같아요.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진원 드림-